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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대한’ 국호 말살작전…“한국 대신 조선으로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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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홍구공원 작탄의거(1932.4.29)를 사흘 앞두고 윤봉길 의사가 거류민단 사무실 대형 태극기 앞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기념촬영을 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대장은 1910년 5월 30일 제3대 통감으로 임명되자마자 비밀리에 ‘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 7일 21개 조의 ‘병합실행방법세목’을 수립했다. 그 제1조가 ‘나라의 명칭’에 관한 것이다. “한국을 개칭해 조선으로 할 것”이라는 방침부터 정해 놓았다. 강제 병탄이 이뤄지기 전부터 일제는 ‘대한’이란 국호부터 말살하려고 나선 것이다.   

‘대한’ 명칭 단 신문·단체 단속
떼거나 이름 바꾸게 강제

해외 독립운동단체들 계속 사용
3·1운동 때도 “대한독립만세” 외쳐
상해 임정 국호부터 대한제국 계승

윤봉길 의거에 감명받은 장개석
김구 만나 광복군 지원 '한·중 동맹'
고종이 쓰던 용어 ‘자유와 독립’
카이로선언 조항 삽입에 앞장

이승만 "김구·윤봉길·장개석 덕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 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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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2월 2일자 뉴욕타임스 1면에 카이로선언 기사와 함께 실린 ‘한국 독립 약속(Pledge Free Korea)’ 제목.

 

 

1943년 12월 2일자 뉴욕타임스 1면에 카이로선언 기사와 함께 실린 ‘한국 독립 약속(Pledge Free Korea)’ 제목.

 
‘한국 강점’이 완료되는 1910년 8월 29일 직후인 9월 2일에는 메이지 일왕까지 나서 “짐이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하는 건을 재가해 이에 공포케 하노라”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제1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전국 언론·출판·교육계와 사회정치단체에서 ‘대한 말살’ 작전을 전개했다. ‘대한’이란 명칭을 단 신문과 잡지, 단체는 ‘대한’을 떼거나(가령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 다른 이름으로 바꾸게 했고(가령 대한신문→한양신문), 이를 거부하면 판매금지시켰다.(이완범,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 60~61쪽)
 
이와 함께 일제는 한국사를 왜곡한 역사책들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인들이 지은 4권의 ‘조선사’가 출간된다. 이케다 쓰네타로(池田常太郞)가 펴낸 『일한합방소사(日韓合邦小史)』(1910. 9. 20), 일본역사지리학회가 편찬한 『한국의 병합과 국사』(1910. 10),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쓴 『조선통사(朝鮮通史)』(1912), 아오야기 쓰나타로(靑柳綱太郞)가 저술한 『이조오백년사(李朝五百年史)』(1912) 등이다. 

 

이 책들 속에서 고종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구도 속에 고종은 그저 ‘세상물정에 어둡고 유약한 군주’ 즉 ‘암약(暗弱) 군주’로 존재감 자체를 상실했다. 명성황후는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갈등으로 나라를 망친 ‘망국의 여인’으로 폄하됐다. 이때 만들어진 한국사의 왜곡된 구도는 1945년 광복 후 한국인들이 쓴 역사책에 그대로 답습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108~123쪽)
 
1910년 9월에 벌써 이런 책들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그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왔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 일제는 1886년 동경제국대학을 설립하고 1888년에 국사과를 설치하여 일본 역사와 조선사를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시게노 야스쓰구(重野安釋)·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호시노 히사시(星野恒)가 공동 저술한 『국사안(國史眼)』(1890), 하야시 다이스케의 『조선사(朝鮮史)』(1892) 등이 19세기 말에 이미 편찬됐다. 일찍부터 정한론(征韓論)과 함께 한국 침략을 염두에 두고 한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영우,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104쪽)
 
일제가 아무리 극악하게 ‘대한’을 지우려고 해도 대한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해외(만주·연해주·미주 등)로 나간 독립운동가들은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하며 대한제국을 계승할 의지를 놓지 않았다.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 앞에는 ‘대한’이 붙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서 전 국민이 외친 구호도 다름 아닌 “대한독립만세”였으며, 그 여파로 수립된 상해임시정부의 이름이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정부 형태는 바뀌었지만 ‘대한’이라는 국가는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한영우,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109, 129~130쪽)
 
‘대한’은 임시정부를 거쳐 다시 1945년 광복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의 국호로 계승되었다. 그런 점에서 대한제국의 역사는 멸망으로 서술을 그쳐선 안 된다. 1904년 2월 일본군의 재침략(갑진왜란)으로 대한제국은 일시 멸망했지만 그것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41년의 장기 항전을 통해 마침내 ‘대한민국’으로 부활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확증한 국제문서인 ‘카이로선언’(1943. 11. 27)이 그 41년간 항쟁의 피어린 역사를 증언한다. 대한제국 역사에 대한 기술은 한시도 그치지 않았던 독립전쟁을 통해 광복이 쟁취되는 시점, 적어도 카이로선언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21~24쪽) 

 

 

 

카이로선언 속 두 개의 ‘비밀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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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선언에는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할 두 개의 ‘비밀 코드’가 들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가 된 수많은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들 가운데 유독 ‘한국(Korea)’만을 두 번 씩이나 명기해 놓은 배경이 무엇일까, 이것이 첫 번째 비밀이다. 두 번째 비밀은 한국의 국명과 함께 쓰인 ‘자유와 독립’이란 표현이다. 자유는 대개 평등과 한 쌍으로 묶여 언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잘 쓰이지 않는 ‘자유와 독립’의 병렬 표기는 고종이 거의밀칙(1909)에 사용한 이래 독립군 사이에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쓰였다. 이런 표현이 어떻게 카이로선언에 그대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카이로선언의 한국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에 말한 세 강대국(미국·영국·중국)은 한국 백성의 노예 상태를 유념하고 적절한 시점에 한국이 자유로워지고 독립적이 되어야 한다고 결의한다.”(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카이로선언에 이 문구를 넣은 이는 장개석 중국 총통이었고, 장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대변하게 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 주석이 있었다. 장 총통과 김 주석이 ‘한·중 군사동맹’까지 맺는 계기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작탄(炸彈) 의거(1932. 4. 29)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장 총통의 한국 광복군에 대한 지원이 시작됐다. 사실상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한 것이었다.
 
장 총통은 윤봉길 의거에 대한 찬탄을 여러 차례 밝혀 놓았다.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해내지 못한 위업을 한국의 한 청년이 능히 처리했으니 장하고도 장한 일이로다.” (『장개석일기』 1932. 5. 26)
 
윤봉길의 작탄 의거는 좌우 노선 싸움으로 분열되며 힘을 잃어가던 임시정부를 다시 소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 인민들과 장개석 총통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한·중 군사동맹’을 이끌어 내고 마침내 카이로선언의 한국독립 조항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장 총통이 카이로 협상 과정에서 임정의 ‘종전 즉시 독립’ 방침을 적극 대변한 배경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미군-중국군-광복군 사이에 존재했던 군사외교적 상호의존 관계다.
 
미국이 일본 본토 공격을 개시하면서 세 나라 군대의 의존 관계가 형성됐다. 미국 공군의 폭격기는 일본에서 700㎞ 떨어진 항공모함에서 이륙해 일본 본토로 날아가 목표 지점을 폭격하고 나면 연료가 다 떨어져 발진항모로까지 귀항할 수 없었다. 미군 비행사들은 일본 본토 폭격 뒤 가까운 중국 본토로 날아가 중국군 작전지역 안에 낙하해 중국군의 구출을 받아 미군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중국군 작전지역이 넓을수록 미군 조종사의 생환가능성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일본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중국군을 지원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카이로선언 협상에서도 장개석의 조선독립 조항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21~24쪽)
 
미군과 중국군의 의존 관계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과정에 한국 광복군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 병사들 가운데에는 강제징집된 한국인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광복군은 중국군과 항일 연합작전을 펴는 과정에서 이 한국 출신 일본군에 대해 심리전을 벌여 이들을 탈영하게 함으로써 일본군의 전열을 와해시켰다. 중국군 안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를 다 구사할 수 있는 병사가 전무했다. 광복군의 규모가 수천 명에 불과했을지라도 중국군의 대일 항전에서 광복군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던 이유다. 이 같은 군사적 실익이 있었기에 장개석 총통은 김구 주석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한·중 군사동맹을 계속 유지하면서 카이로선언의 한국독립 조항을 넣었던 것이다.
 
김구와 독립운동가들이 애용한 ‘나라의 독립과 백성의 자유’라는 표현까지 장개석 총통은 그대로 인용해 넣었는데, 이는 본래 고종이 1909년 3월 15일 내린 ‘서북간도와 부근 각지 인민들에 대한 칙유’에 나오는 말이다. 고종은 “오로지 독립이라야 나라이고, 오로지 자유라야 백성이다”고 천명하면서 항일 독립전쟁을 고취했다.(이태진,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연구』 315~317쪽)
 
이에 앞서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민영환의 유서에도 이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1905년부터 고종과 근왕세력 사이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한인애국단 입단선서문’에 쓰인 문구도 ‘자유와 독립’이었다. 임시정부 문서와 독립운동가들의 언설 속에 이 ‘자유·독립’이란 표현은 수도 없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편찬, 2005)

프랭클린 루스벨트 ‘40년 신탁통치’ 획책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장개석 총통이 한국독립 조항을 계속 넣자고 하는 것을 시종 탐탁해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일제 식민지 36년보다 더 긴 ‘40년 신탁통치’ 음모를 획책하면서 한국의 ‘종전 즉시 해방’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반대로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한국독립 조항을 넣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국은 두 명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안 좋은 인연이 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1905년 당시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제와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으며 한국을 배신하고 일제의 한국 병탄을 도왔다. 고종이 한·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내세워 이승만과 호머 헐버트 등을 미국에 특사로 파견해 도움을 요청하던 순간 미국은 우리의 손을 뿌리쳤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 미국이 6·25전쟁 이래 한국의 가장 든든한 동맹국이고 앞으로 남북통일 이후에도 계속 한·미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성과는 별개의 사안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중국이 힘을 계속 키워가며 오만한 행위를 더해가는 오늘의 상황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는 데 미국과의 군사동맹은 필수적이다.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은 일본이나 중국처럼 한국의 영토에 대한 야욕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동맹국으로서 가장 적합한 조건의 강대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대한제국 시기에 한국에 범한 오류와 잘못까지 모두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구의 신탁통치 반대투쟁은 1945년 광복 이후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선 1943년 중경임시정부에서 ‘제1차 반탁투쟁’을 전개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40년 신탁통치’ 의도를 간파한 김구와 임시정부의 반탁투쟁으로 루스벨트의 의도는 일단 좌절되었지만 카이로선언 속에 ‘적절한 시점(in due course)’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그 흔적을 남겼다. 한국의 종전 즉시 독립을 유보한 이 표현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는데 루스벨트와 처칠의 합작이었다. (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585~617쪽)
 
루스벨트와 장개석의 만찬회담에 동석한 홉킨스 특별보좌관이 작성한 기안에서 이 문제의 문구는 당초 “일본의 몰락 후 가장 빠른 가능한 시점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로 되어 있었다. 이를 루스벨트가 수정해 만든 표현이 “일본의 몰락 후 적당한 시점에(at the proper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였다. 루스벨트의 수정을 거치며 “가장 빠른(the earliest)”이란 표현이 빠진 것이다. 이것으로써 루스벨트가 종전 후 즉각 독립을 원하는 한국·중국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문학적 재능이 있는 처칠이 루스벨트의 속셈을 읽고 “in due course”로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 최종안이 되었다. 인도를 식민지로 두고 있던 영국의 처칠은 자신들의 식민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며 한국독립 조항 자체를 넣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정병준, ‘카이로회담의 한국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과정’ 331~336쪽)
 
카이로선언에서 일시 은폐됐던 ‘40년 신탁통치’ 음모는 1945년 광복 직후 ‘5년 신탁통치’로 축소돼 다시 등장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 국무장관이 영국과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한 이 ‘5년 신탁통치’ 방안은 소련의 중재로 ‘3년’으로 수정되어 결정됐다. 그러나 이 ‘3년 신탁통치’ 결정도 김구의 ‘제2차 반탁투쟁’에 의해 분쇄되었다. 김구는 1945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회의를 다시 소집해 임정의 지휘 아래 이승만과 연합해 범국민적 반탁투쟁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의도는 물론 소련의 사주를 받는 좌익 찬탁세력까지 모두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이승만·루스벨트·홉킨스 3인이 카이로선언의 수훈자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것은 사실(史實)과 배치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자신이 직접 명문(明文)으로 카이로선언에 한국조항을 넣은 공로를 윤봉길·김구·장개석 3인에게 돌렸던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봉창·윤봉길 등 한인애국단원들의 의거를 기록한 『도왜실기(屠倭實記)』의 국역판(1946. 6. 2.) ‘서문’에서 이렇게 밝혀 놓았다. “윤 의사의 장거(壯擧)가 있은 후로 중국 관민(官民)의 한인을 대하는 태도는 우호와 신뢰로 일변해 한·중 양국은 자고로 순치(脣齒)의 관계에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으니, 국민정부는 물론이요 장개석 주석부터가 김구 선생을 절대로 신뢰해 음으로 양으로 대한임시정부를 성원해준 것은 모두 이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중에도 한국 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 주석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창해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은 역시 그 원인이 윤 의사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승만은 또 1947년 4월 13일 중국 남경을 방문해 장개석과 만난 자리에서 “장 주석이 카이로회의 시 한국의 독립 주장을 적극 옹호하여준 데 대하여 재삼 감사의 예를 표한다”고 칭송한 바 있다. (정병준, ‘카이로회담의 한국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과정’ 319쪽)
 
카이로선언 속 한국독립 조항 삽입, 그리고 1·2차 반탁투쟁의 승리를 통한 한국의 광복은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1919년 임시정부의 수립은 3·1만세운동이라는 전 국민적 공분의 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민적 공분이란 일제의 ‘고종 독살’에 대한 분노였다.(이태진, 『끝나지 않은 역사』 220~221쪽)
 
당시 일제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공표한 민족자결주의 선언의 국제적 파장이 한국에까지 파급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고종은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강제성을 폭로하며 국제적 독립투쟁을 벌이는 동시에 이와 별도로 자신의 북경 망명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민족 장교’를 육성하던 독립운동가 이회영이 고종의 망명 일정을 조율했다. 육로가 아닌 배편을 선택하고, 북경에 행궁을 마련하는 등 구체적 준비를 순조롭게 진행하다가 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중단되고 말았다.    


자문 전문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참고자료  『갑진왜란과 국민전쟁』(황태연·청계·2017), ‘카이로회담의 한국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과정’(정병준·『역사비평』·2014년 5월),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연구』(이태진·지식산업사·2016), 『끝나지 않은 역사』(이태진·태학사·2017),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한영우·경세원·2016),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이완범·『황해문화』·2008년 가을)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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