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시부모인 영친왕 내외의 요청으로 남편 이구(왼쪽)를 따라 한국에 온 줄리아 리.
이들은 이때부터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했다. [중앙포토]
조선왕가 마지막 세자빈의 죽음은 처연했다. 타계 소식조차 열흘이 흐른 5일 뒤늦게 알려졌다.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 이은의 외아들인 고(故) 이구(李玖)의 부인 줄리아 리(본명 줄리아 멀록)가 지난달 26일 미국 하와이의 할레나니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4세.
2000년 9월 일시 귀국한 줄리아는 한 달 여 머물면서 추억의 장소를 둘러봤다. 시아버지 영친왕의 묘소를 참배하고 한때 안주인으로 살림을 살았던 낙선재에 들러 장애인 제자들을 만났다. 이구 선생에게 직접 전해주고 싶었을 조선왕가의 유물과 한국 근대사 관련 사진 450여 점을 덕수궁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이때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제목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이혼 후 그렇게 바라던 이구와의 재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줄리아 리는 먼 발치에서 운구행렬을 지켜봤다.
장례식이 끝난 뒤 홀로 이구의 묘 앞에서 절을 올렸다고 한다.[중앙포토]
그토록 만나기를 원했던 전 남편과의 재회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2005년 7월 16일 일본 도쿄의 옛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이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이구 선생의 유해는 20일 국내로 들어와 장례를 치렀지만 줄리아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낙선재와 종묘를 거쳐 장지로 떠나는 장례행렬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014년 성탄절에 말년까지 소식을 주고 받은 유일한 한국 친족 이남주 교수 가족과 하와이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줄리아 리. 왼쪽부터 이남주 교수, 이 교수의 외아들 윤희선씨, 줄리아, 이 교수의 며느리 김현주씨, 손자 윤성민군. [사진 이남주]
지난해 10월 하와이 요양병원으로 찾아가 줄리아와 이별 인사를 나눴던 이 교수는 “나를 보고 처음에는 멍하니 있다가 ‘이건 기적이야’라고 중얼거리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한 남자를 사랑했기에 비운의 황족이 외면받는 먼 이국땅이라도 운명처럼 따라나섰던 줄리아의 삶이 끝났다. 100여 년 전 사라진 대한제국의 희미한 그림자가 언뜻 비친다.
시부모인 영친왕 내외와 함께 사진촬영한 줄리아 리. 왼쪽부터 줄리아, 영친왕, 이방자 여사.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이구(1931~2005)=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대한제국 황실 제3대 수장인 영친왕 이은과 일본인 부인 이방자의 아들이다. 미국 MIT 공대에 유학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로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건축설계를 강의했고 건축설계회사 ‘트랜스 아시아’를 운영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 종묘제례 봉행위원회 총재로 활동했다.